[내가 으뜸] 한국인 유일 美 시계학회 마스터자격, 정윤호 명품갤러리 대표
“한 국가의 산업발전 수준을 시계 제조기술로 가늠할 수 있을 만큼, 그 기술의 의미는 남다르다. 최첨단 산업의 기초에도 시계산업이 탄탄히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정부는 시계 제조ㆍ수리 관련 기능공 자격증을 부활시키는 등 시계산업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갖춰야 한다. 뛰어난 인재가 넘치는 우리나라가 시계 선진국 수준을 능가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지원정책도 절실하다.”
우리나라 시계 제작ㆍ수리 분야에서 으뜸 달인으로 통하는 정윤호(58) 명품갤러리 대표를 만났다. 그는 한국에서 배출된 시계명장(名匠) 총 6명 가운데 두 번째로 자격을 취득한, 업계에선 명성이 자자한 전문가다. 현재 시계명장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미국시계학회(AWCI)가 매우 까다로운 조건과 엄격한 심사를 거쳐 수여하는 마스터 자격(American Certified Master Watchmaker)을 유일하게 취득한 한국인이다. 이 마스터 자격을 보유한 아시아계 기술자는 일본인을 빼면 그가 유일하다.
그는 우리나라 시계산업 발전을 제대로 꾀하고 싶다고 인터뷰 내내 강조했다. 시계의 핵심장치인 무브먼트(시계 구동 부품)를 국내에서 개발하지 못한다고 해도, 시계판 장식과 케이스 등 여타 부품은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 받고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결국 우리의 디자인 저력으로 해외 시계시장을 이끌어 갈 날이 머지않았다는 그는 정부의 개발투자와 정책지원이 더해진다면 그 시기를 더 앞당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
유명 수리공 찾아다니며 기술 쌓아가
그의 최종 학력은 중학교 졸업이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에서까지 시계명장의 자리를 꿰찼다. 그는 어떻게 시계산업에 몸담게 되고 최고 자리에 올랐을까?
때는 중학교 2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을 차다가 자기와 부딪친 친구의 손목시계가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그의 인생을 결정지은 ‘사건’이다.
“손목시계가 귀하던 시절이다. 부서진 시계부품을 보고 ‘저거다’ 싶었다. 시계 내부의 무브먼트에서 시계 밑판, 지침 등 부속품을 본 건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미래는 첨단기술이 더 발전할 테고, 내 인생을 시계에 걸어야겠다는 확신까지 갖게 됐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가까스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유명 시계방을 무작정 찾아가 막무가내로 일하게 해 달라고 졸랐다.
“그때 어떻게 그런 호기가 생겼는지…. 그땐 모두들 어려운 시기였다. 월급을 전혀 받지 않을 테니 식사만 해결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매달려 일할 기회를 얻곤 하는 식이었다. 내 인생을 걸 기술을 배우는 데 자존심은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 곳에서 기술을 습득했다 싶으면 다른 시계수리점을 찾아나섰다. 시계에 인생을 걸기로 한 이상 최고의 스승을 찾아야겠다는 열망이 컸다. 최고의 길을 가기 위해선 그 길밖에 없다고 믿었다는 거다. 그의 빠른 손놀림과 예술성을 높이 평가한 시계방 사장들은 월급을 높이겠다거나 보너스를 주겠다며 머물 것을 바랐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렇게 그는 전국의 이름난 시계방을 거의 다 돌았다. 1968년 1월부터 그가 군대에 입대하기 전인 1973년 7월까지 20곳 넘는 곳에서 근무했다.
1976년 7월,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그는 시계전문점을 열었다. 이때부터 승승장구했다. 기술로 빛을 발하겠다는 그의 신조가 시장에서 통하기 시작했다.
해외 전문서적ㆍ학술지 번역 의뢰해 공부
“못 고칠 정도로 고장 난 시계의 경우엔 부품을 만들어서라도 고쳤다. 기술과 관련된 일에는 열정을 쏟았다. 물론 시계 판매수익보다 수리수익은 턱없이 적었다. 그러나 돈만 보고 시계업을 벌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국내 시계판매점 중 가장 큰 시계기술센터까지 오픈하면서 수리부문에서 주목받았다.
이 당시 그는 해외 시계관련 전문서적과 학술지를 집중적으로 번역시켰다고 한다. 일본ㆍ스위스 등 시계선진국의 가치가 있다는 서적은 모조리 번역을 의뢰한 뒤 파고들었다. 이때 배운 것을 지금도 써먹을 정도로 탐구의 시기였다.
“군 제대 후 면목동에서 1998년까지 시계기술센터와 전문점을 운영하면서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시계와 관련된 고급 정보는 국내건, 해외건 관계없이 모두 습득하려 했다. 무엇보다 그 내용을 시계업 종사자들과 나누기 위해 협회지와 관련 서적에 다양하게 기고하면서 업계에서 인정 받은 건 무엇보다 보람 있었다.”
시계 제작과 수리 요령, 명품 브랜드의 뒷얘기, 스위스를 비롯한 선진국 부품의 특징 등을 재미있게 풀어내면서 독자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 역시 학문의 재미에 흠뻑 빠져들어 행복한 때였음은 물론이다.
1998년 그는 국내 시계명장으로 뽑혔다. 그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선정과정이 매우 까다롭고 치열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시계학회(AWCI)의 마스터 자격에 도전해 취득했다. 이 시험은 보름간 열렸는데, 멀쩡한 손목시계 3개를 망치로 부순 뒤 수리해 다시 완성하라는 테스트가 있을 정도로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수도권 등에 박물관 건립 고려 중
그는 10여 년 전부터 종로 등 두 곳에서 수리전문점과 판매점을 운영하고 있다. 강남구 논현동 전문점에는 그가 지금까지 모은 1600여 점의 역사성을 띤 시계도 전시하고 있다. 해시계ㆍ램프시계ㆍ양초시계 등 박물관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물건도 여럿 있다.
“시계업계의 발전시기인 1960년대 말부터 몸담아 지금까지 인정 받고 생계를 이어온 만큼 전시 또는 교육 등 형태로 받은 것 이상을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크다.”
그는 수도권 또는 서울 도심 내에 부지를 구해 제대로 된 시계박물관을 건립하겠다고 구상하고 있다. 이곳에는 교육센터를 반영해 학생들이 손목시계ㆍ탁상시계ㆍ벽시계 등을 만들어보는 체험공간을 조성하려는 생각도 가꾸고 있다.
그는 시계제조업에도 본격적으로 뛰어들 요량이다. 미국ㆍUAE(아랍에미리트) 등으로부터 이미 수차례 5000만~6000만원대의 고가 시계 제작을 의뢰 받은 경험을 살려 이 시장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포부다. 특수한 시계로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작지만 강한 기업으로 한국을 세계에 알릴 준비를 하고 있다.
글ㆍ사진=박우병기자 mj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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