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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 December 20, 2012 | view 8,061
20. 근대조선의 천재과학자 강윤 
 
고대인류가 문명사회를 이루기 시작한 기원전 7000년 경부터 통치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접근했던 과제가 시간의 운용이었다. 권력은 힘으로부터 나왔으나, 권력을 장악한 왕들은 그들의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강한 힘도 필요하였지만 무력을 이용한 통치가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여 정벌이라는 미명 하에 주변국가를 침략하여 세계를 정복하였다는 정복자들도 그들이 정복한 나라의 문화에 흡수되어 결국 정복한 나라의 문화예술에게 정복되는 아이러니는 우리 인류가 꾸준하게 생각하는 사고를 키워가는 고등동물이기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일 것이다.
 
가까운 예는 한( 漢 )나라를 정복하여 원( 元 )나라를 세운 경우이다. 원나라를 건국한 몽골인들은 한나라를 정복하였으나 중원문화에 흡수되어 결국에 그들보다 우수한 문화 예술을 이룩한 중원문화에 정복되어버리는 결과에 승복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인 독립운동가들도 우리말과 글을 잊지 않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일제는 우리말과 글을 말살하기 위하여 혹독한 탄압을 하였던 것이다.
 
[그림 1] 숙종때 만들어진 앙부일구다. 유감스럽게 세종 때의 앙부일구는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우리 근대사의 역사는 서양 강대국들의 개방압력과 침략야욕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투쟁하였던 선조들의 노력과 왕실의 고통, 그리고 백성들의 고난과 수난의 역사이다. 1863년 재위한 고종은 12세의 나이에 즉위하여 아버지 흥선군을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으로 높여 국정을 총람하게 하였다.
 
역사학자들은 흥선대원군을 쇄국정책 주의자 또는 반실학파 라고 평을 하지만 필자는 다른 의견이다. 대원군의 근대조선의 과학 발전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과 신분에 관계없이 기술만 있으면 등용한다는 원칙은 지극히 실학적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추사 김정희와 교분이 두터웠던 대원군으로서는 당시 실학파였던 추사의 제자 위당( 威堂 ) 신관호( 朴珪壽 )와 박규수( 朴珪壽 ) 등 과도 교분이 있었을 것이며, 대원군 집권 후에 신관호, 박규수, 김기두, 강윤 등이 대원군의 전폭적인 신임과 함께 크게 활약한 것은 대원군이 실학파이었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이익( 李瀷 ), 홍대용( 洪大容 ), 정약용( 丁若鏞 ), 최한기( 崔漢綺 )로 이어지는 조선실학자들의 행적에 사대부의 자손이며 무과에 급제한 신관호에 대한 기록은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우리는 근대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 한 분에 대해서는 역사의 기록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대원군의 근대조선 과학발전을 위한 실학적인 정책은 필연적으로 강윤( 姜潤 )이라는 위대한 과학자를 우리 근대사에 등장하게 하였으며, 그의 위대한 족적은 최근 한국방송공사(KBS TV) 전통문화프로그램인 쇼 진품명품에서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그림 2] KBS 진품명품에 출품되었던 강윤의 휴대용 해시계 앙부일구다. 고종황제가 사용하였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강윤은 1866년 대원군에 의하여 등용되었다. 1866년 미국 무역선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당시 장마로 인하여 강물이 불어난 대동강 상류까지 침범하여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자 평양감사 박규수가 화공으로 공격하여 침몰시킨다. 이때에 제너럴 셔먼호의 승무원 전원이 사살되었으며 대원군은 제너럴 셔먼호에서 인양된 증기기관을 모방하여 실제로 제작하게 하였다.
 
이때에 기계기술이 뛰어난 강윤은 증기기관 수리와 제조, 그리고 제너럴 셔먼호에서 인양된 서양식 대포를 개량하기도 하였다. 처음 강윤은 기술자로서만 활약한 것 같다. 강윤은 대원군에 의해서 등용되기 전에는 해시계를 전문으로 제작하였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강윤의 역사적 기록은 그의 활약에 비하여 너무나 빈곤하다. 세종대 우리역사에 가장 빛나는 과학자 장영실에 관한 기록도 그러하듯이 필자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강윤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세종 대부터 이어지는 시계의 역사는 장영실, 정초, 김돈, 이무의 4명의 과학자부터 시작하여 최유지( 崔攸之 ), 허원( 許遠:숙종 41년인 1715년 왕명에 의하여 자명종을 관상감에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허원이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다 ), 송이영( 宋以穎 ), 이민철( 李敏哲 ) 등을 이어서 강윤과 강건이 있다.
 
강윤과 강건은 동시대인 구한말부터 개국 후까지 같이 활약을 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두 분이 부자지간인지 아니면 형제간인지 아무런 기록이 없다. 두 분 모두 휴대용 해시계를 거의 같은 형식과 동일한 디자인을 만들고 있는데, 특히 강윤은 평면 해시계 제작자로 알려졌었다.
 
[그림 3] 강윤의 휴대용 해시계의 구면이다. 하루를 96각으로 나누는 시간선과 13줄의 절기선이 정교하게 그려져있다.
그러나 2003년 8월 17일 오전 11시 KBS TV 전통문화프로그램인 쇼 진품명품에서 출품된 휴대용 앙부일구는 강윤이라는 근대조선의 휴대용 해시계 제작자의 뛰어난 과학 기술의 수준이 당시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필자는 현재 동시대의 여러 개의 선진국의 해시계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소장자와 KBS의 도움을 받아서 유럽 선진국의 해시계들과 미국의 해시계들 그리고 강윤의 해시계를 비교 분석할 수 있었다.
 
이 휴대용 앙부일구의 크기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휴대전화와 크기는 같다. 재료는 상아였으며 나침반과 수평을 알 수 있는 다림대(수평대)가 휴대용으로서는 유일하게 발견되었으며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동안 발견된 두어 점의 휴대용 해시계들 모두가 다림대가 온전하지 못하여 많은 학자들은 끈시표를 연결하는 영표지주라는 학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만일 그것이 영표지주며 끈시표를 연결하여 사용한다면 해시계가 아닌 녹터널(Nocturnal)로 분류하여야 하며 당연히 시간이 정확하게 측정될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많은 서양의 녹터널은 분명하게 정확성에서 해시계라고 분류할 수 없었다.
 
해시계는 언제 어디서나 측정하는 장소의 진태양시를 표시하므로 램니스태이트(Lemniscate)의 곡선에 의한 균시차 오차만 있을 뿐 가장 정확한 지방 표준시계이다. 만일 조선의 휴대용 해시계의 다림대가 끈시표를 연결하는 영표지주라면 그것은 우리 조상의 빛나는 문화유산을 폄하시키는, 즉 당시 세계 최고의 과학 기술에 의해 탄생된 선조들의 해시계 제조기술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그림 4]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1800년 대 후반 영국해군이 사용하였던 휴대용 해시계다. 남 북반구 어디에서나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
그들이 정말 끈시표를 연결하여 시각을 측정하였다면 전혀 다른 시각을 표시하는 해시계에 당황하였을 것이다. 고대의 유물을 발견하여 그 유물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특히 해시계의 고증은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원형의 그대로 발견이 되었다면 별문제는 없겠으나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격은 유물들이 원형 그대로 보존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기대이다.
 
발견된 장소의 위도를 기준하여 제작되었는지 아니면 장소가 옮겨질 때마다 달라지는 시각의 차이를 균시차표에 의하여 수정하여 사용한 해시계인가. 또는 [그림 4]의 시계와 같이 지구의 어느 곳에서도 시각을 측정할 수 있는 다용도의 해시계인가를 먼저 분석하여야 한다.
 
[그림 5] 강윤의 평면해시계다. 시반과 다림대만 발견되었으며 나침반과 영침(Gnomon)이 없어져 다림대를 영표지주라는 잘못된 오해를 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안일한 자세로 해시계를 연구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해볼만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여태까지 많은 해시계에 관한 연구논문을 읽어보았지만 우리조상이 만든 해시계에서 유일한 독창적인 해시계 앙부일구를 많은 학자들은 원나라의 곽수경의 해시계를 모방한 것이라고 폄하하는 등(실제 곽수경의 해시계는 앙부일구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해시계다) 외국의 해시계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체 우리 것의 흠집내기에만 열중하였던 것 같다.
 
실제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앙부일구의 균시차에 대한 연구는 아직 아무도 연구하지 않은 불모지다. 서양의 해시계는 많은 연구가 있어서 램니스태이트의 곡선에 의하여 나타나는 균시차를 보정하는 방법이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으나, 앙부일구에 관한 균시차 연구를 한 논문을 필자는 아직 접해보지 못했다.
 
강윤의 휴대용 해시계는 글자 그대로 휴대용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사용자는 손바닥 위에 해시계를 올려놓고서 북쪽을 등에 지고 남쪽을 향하여 시계에 장착된 나침반을 이용하여 시계의 자오선을 정렬하였다. 그리고 다림대에서 떨어지는 다림줄 끝에 매달려있는 수평 추의 위치를 다림대 하단의 꼭지점에 맞추면 이 휴대용 해시계는 정확한 측정 당시의 절기와 시각을 표시하였다.
 
 
[그림 6] 13줄의 절기선에 24절기가 위당 신관호의 필체로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모든 해시계는 측정 장소의 진태양시를 가리키므로 강윤의 해시계는 동경 127°인 서울의 시각을 정확하게 표시하므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동경 135°보다 30분의 늦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물론 강윤의 해시계에도 매일 달라지는 태양의 일주운동에 의하여 균시차는 발생하였다. 강윤의 해시계는 매일 달라지는 균시차를 보정하면 측정오차 몇 초의 오차 이내로 시각을 측정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한 해시계였다.
 
근대조선에서 서양의 과학기술이 어느 정도 유입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익( 李瀷 ), 홍대용( 洪大容 ), 정약용( 丁若鏞 ), 최한기( 崔漢綺 )로 이어지는 조선실학자들의 과학 수준은 분명 서양의 과학기술 특히 일본의 과학기술 수준에 비교하여 미미한 것이었다.
 
그러나 강윤의 해시계에 설치된 영표는 분명 네피어 법칙이 사용되어 설치되었으니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서양의 네피어 법칙을 배우게 되었는지. 아니면 그 나름대로 연구하여 구면의 남극에 영침을 완벽하게 설계하였는지 필자의 좁은 지식으로는 130년 전의 강윤의 과학기술의 수준을 가늠할 수는 없었다.
 
앙부일구의 구면은 반구의 원형에 남북을 잊는 자오선과 춘·추분선인 적도선 그리고 영침이 설치된 남극점, 그리고 구면의 윗 부분의 가상의 북극점, 또한 24절기를 표시하는 13줄의 24절기 선이 정확하게 직경 40mm의 구면에 설계되어있으니. 첨단의 과학기술과 천재적인 수학공식, 그리고 신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 공예기술이 필요한 것이었다.
 
강윤의 해시계 중에 현재 옥스포드(Oxford)의 아시아 박물관에 1810년 강윤이 만든 상아제소형휴대용앙부일구( 象牙製小形携帶用仰釜日晷 )가 있다. 그러나 이 해시계의 제목에 놀라게도 일본의 유물이라고 설명되어 있으며, 영어 안내판에는 Japanese Scaph Sundial( Hidokei 姜潤 ) 라고 표기되어 있어 우리 정부의 외교활동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그림 7] 위당 신관호는 강윤과 함께 이 휴대용 해시계를 제작하면서 전서체와 예서체 그리고 해서체를 이용하여 자신의 필체를 새김으로 인하여 이 휴대용 해시계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이 옥스포드의 앙부일구는 잘못된 고증도 문제이지만 강윤은 1860년대부터 시계를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1897년까지 중추원 1등 의관과 별감동으로 활동한 기록으로 볼 때 1810년의 작품이라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옥스포드 박물관의 앙부일구는 분명 1870년 강윤이 통진부사로 재직 중에 고종의 휴대용 앙부일구를 만들기 위하여 시험삼아 만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강윤은 가끔 특별한 해시계를 제작하여야 할 경우 시험삼아 만들었다는 기록이 그의 해시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간악한 일본인들이 강윤의 위대한 작품인 해시계를 발빠르게 영국으로 쫓아가서 강윤( 姜潤 )을 일본식으로 발음하여 히도게이(Hidokei)라고 영국의 학자들을 속인 것이다. 또한 제작년도 역시 1870년을 1810년이라는 방법으로 마치 조선의 천재 시계제조자인 강윤이 자신들의 나라의 조상인 것처럼 해석한 것이다. 참으로 통분할 일이다. 이 나라의 정부의 관료들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영국주재 우리 대사관은 무엇을 하고있는가... 너희가 정녕 이 나라의 관리이며 지도자들인가...
 
[그림 8]은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영국 왕실의 해시계다. 제작 연대는 강윤의 해시계 보다 3년 후에 만들었으며 영국인 나름대로 예술성을 높이기 위하여 많은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계는 분명 강윤의 시계보다는 과학성과 실용성 그리고 예술성은 크게 떨어지고 있다.
 
[그림 8]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1880년 영국 왕실에서 소장했던 상아제를 사용하여 만든 해시계다. 영국의 장인이 많은 공을 들여 만들었으나 강윤의 해시계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강윤은 1866년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등용되었다. 그의 처음의 벼슬은 알 수 없지만 대원군이 실각하기 몇 달 전인 1873년 5월 삼군부( 三軍府 )에서 올린 보고서를 보면 그는 근대조선의 군사무기 개발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삼군부의 보고서에는 강윤은 통진부사( 通津府使 )를 지내면서 군사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에 그에게 해미현감( 海美縣監 )으로 발령한다는 왕명이 있었으나, 통진부사를 계속 지내면서 군사무기 개발에 전력하고 싶다는 보고서를 올려서 고종의 허락을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강윤에 대한 고종의 신임과 총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통진부사와 해미현감의 직급차이는 너무나 큰 것이어서 왕명을 거두고 강윤의 소청을 들어주었다면 당시 그가 조선의 과학발전에 상당한 위치에 있었음을 증명한 분명한 예라 할 수 있다. 그 후 그는 대원군의 실각 후에도 1877년 이 세기의 걸작품인 휴대용 앙부일구를 1877년 5월 10일 고종에게 진상하였으며, 우리문화 역사에 길이 빛나는 자랑스러운 보물을 물려주었다. 강윤은 고종26년(1889년 9월 19일) 제1810대 판한성부사(현재의 서울시장)를 제수 받았으며, 개국 후인 1897년에는 중추원( 中樞院 ) 일등의관( 一等議官 )에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1895년( 高宗 32 ) 8월부터 1897년 11월까지 명성황후의 산 능을 별감동( 別監董 )으로 참여하여 산 능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그림 9]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1700년 경에 중동의 이슬람인들에 의해서 제작된 진품의 아스트롤라베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정확한 천문시계이다.
강윤( 姜潤 ). 그는 정치적으로 근대조선의 중요한 인물이었으나, 항시 그는 단풍나무가 있는 해시계공방의 작은 주인임( 紅葉少主人 )을 자랑스러워하였으며, 우리 시계인들의 가슴 속에는 근대조선의 위대한 천재시계인으로 살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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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자대학교 교수 정 윤 호